작성일 : 2021-11-22 16:54
이름 : 최영태
兵曹參議 和順 崔公 諱 元之 遺墟碑
公의 諱는 元之 本貫은 和順이다. 始祖는 高麗朝 名相 諱 世基이다. 歲月이 遙遠하여 失傳하고 檢校軍器監을 거쳐 平章事를 曆任한 諱 桂를 甲子譜부터 一世로 起書하여 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며 바로 公의 高祖父다. 曾祖는 諱 堰으로 西北面都監判官이었다. 祖位는 諱 繼臣으로 奉常大夫典客令知平章事이고 祖妣는 貞夫人基州安氏이며 考位는 忠節公 諱 永濡로 高麗 忠肅王때 文科壯元及第하여 奉常大夫監察待製掌令司成直寶文閣知制誥禮部尙書등을 歷任하고 海州牧使에 轉補되어 善政을 베풀던중 紅巾賊亂을 당하여 城이 陷落하게되자 亂賊에게 恥辱을 당하며 살 수 없고 盜賊의 칼에 몸을 더럽힐수 없다하며 깊은 물에 몸을 던져 殉國하시니 온 海州邑民이 感泣하였고 朝庭에서도 忠節公이라는 諡號를 내렸으며 文憲公 崔沖書院에 配享되었고 妣位는 貞夫人陽川許氏로 智德을 兼備한 父母의 아드님으로 誕生하였다.
公은 朝鮮朝 兵曹參議 戶曹參議 宗簿令을 거쳐 慶尙道按廉使로 金山入鄕祖이며 參議公派의 派祖로서 閥族으로 繁盛하였다. 처음 高城山下 耈岩寺에 居處하다가 耈岩寺가 廢止되어 그 洞里를 賀老라 이름하고 子孫들의 同居同姓洞이 되었다. 公의 配位는 貞夫人解顔白氏이며 墓는 龜城面陽角洞墨坊坎坐다. 膝下에 三男三女를 두었는데 長男은 諱 自海로 벼슬이 密陽都護府使로 府使公派派祖이고 次男은 自河며 濟用監副正으로 副正公派派祖이고 三男은 自江으로 贈吏曹判書이고 諡號가 文貞이며 文貞公派를 形成하였다. 自海의 子 善復은 號 豆谷으로 慶州府使요 孫 漢源은 大司憲으로 三男을 두었다. 曾孫 沃은 進士로 號는 誠菴이며 己卯名賢으로 後孫은 全北 淳昌에 世居하고 澐은 縣監으로 號는 三池堂 혹은 水雲으로 己卯名賢이다. 後孫 參奉 星老는 全南 羅州에 世居하니 子인 掛鋤亭 雲挺이 繁昌하다. 源은 父의 流配地 江界에서 起居하여 後孫은 黃海道 載寧 平北 定州에 世居하다. 自河의 子 安善은 贈司復寺正이고 孫子 士老는 文科及第하고 拔英試에 登科 世祖朝原從功臣으로 벼슬이 大司成이요 曾孫 漢禎은 吏禮曹參議 贈吏曹參判이요 漢忠은 護軍으로 그의 玄孫 嘉善大夫 慶尙道 觀察使 嵂이 壬亂때 勇敢히 싸우다가 殉職하고 嵂의 女가 延安李氏 芳草亭公의 配位로 壬亂時 殉節하여 烈女 旌閭가 下賜되었다. 漢良은 直提學이다. 自江이 三十七歲때 中部令 在職中 全南光陽으로 流配되었다가 五十歲에 귀양에서 풀려 歸鄕中 全南 求禮郡 山洞面 桂川里 玄川部落 隣近에서 病死하니 配位 晋州姜氏는 夫君의 屍身을 안고 七日間 食飮을 全廢하고 慟哭하다 殉死하니 烈女로 旌閭되고 續三綱行實圖에 姜氏抱屍圖가 收錄되어 貞節의 龜鑑이 되었다. 自江의 子 善門은 端宗朝 工曹判書로 世祖가 내린 左贊成을 不就한 節臣으로 東學寺 肅慕殿및 金山 景濂書院에 配享되었고 諡號는 文惠公이요 孫 漢公은 벼슬이 典翰으로 號가 老谷이요 漢候는 大司諫으로 號가 養性齌이고 漢佰은 僉使요 漢藩은 持平 漢男은 成均進士로 이 다섯孫子가 모두 登科하여 벼슬을 하였으므로 賀老를 世稱 五子登科坊이라고 한다. 參議公 後孫에 名卿碩德이 줄을 이었으니 이를 다 記錄하지 못한다. 다만 近世人物로서 松雪堂을 빼놓을 수가 없다. 松雪堂은 一九三十년 當時 自己 全財産 三十二萬千圓을 快擲하여 金泉高普를 創立하였으며 오늘날 金泉中高로 發展하여 金泉의 人才를 輩出하는데 至大한 貢獻을 하였으며 公의 十九代孫 錫采公은 忠孝 節義 淸白의 和順崔氏傳家의 精神을 이어받아 大每編輯局長과主筆 朝鮮日報論說委員과主筆등을 거쳐 文化放送과京鄕新聞會長을 歷任하면서 不義에는 조금도 妥協하지 않고 權力의 非理에 奮然히 맞서 正義의 筆鋒으로 많은 名社說을 쓰서 韓國言論界에 큰 足跡을 남겨 政府로부터 金冠文化勳章을 受賞하였으며 西紀二千年 五月에는 國際言論協會에서 二十世紀言論自由英雄으로 選定되어 韓國言論의 位相을 世界萬邦에 誇示하였다. 泳琯 元鳳 龍石 三人이 나에게 글을 請하므로 世誼를 拒絶치 못하여 淺學非才를 不拘하고 감히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글을 올립니다.
西紀 二千二十年 十一月 二十二日
延安後人 素沙 李 鉉 敦 謹撰